[이치카라] 버리러 가는 길
*이치마츠 등장 안함
*짧음
*_(:3ㄱㄴ)_ 포기하는 카라마츠
하나 둘 모아 본 물건들이 작은 상자에 가득 찰 때까지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작은 상자가 가득 차오를 때, 그는 떠나야 함을 알고 있었다.
언제나 시간은 제 기분과는 상관없이 흘러간다. 가지 않았으면 하는 시간들은 너무나 빨리 사라지고 견디기 괴로운 시간들은 발밑에 고여든 핏물처럼 흘러가는 초침에 엉겨붙었다. 처음 모든 것을 결심했을 때에는 작은 새싹이 피어오르고 바람은 기분 좋게 살랑거리는 어느 봄날이었는데, 이제는 창문 밖으로 매서운 바람과 커다란 눈송이들이 바람에 휘날리고 방 안에 아슬아슬하게 피어오른 난로에선 더운 열기 대신 아지랑이만 가득한 겨울이 되었다. 그는 발갛게 달아오른 손끝을 제 입김으로 조금씩 녹아내다가 고개를 들었다.
틱, 틱, 틱... 벽에 걸린 벽시계에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초침이 제자리를 헛돌며 시끄러운 소음 소리를 만들고 있었다. 시계에 약이 다 떨어졌구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모습이 꼭 저를 닮은 것 같아 그는 헛헛한 웃음을 흘리며 까치발을 들고 벽에 걸린 시계를 내렸다.
9시 31분. 제 자리에 멈춰선 큰 바늘과 작은 바늘은 제각각 9와 6을 조금 넘어간 숫자를 가리키고 있다. 아. 그는 작게 탄성을 내지른다. 그러고 보니 처음 둘 만의 보금자리로 오게 되었을 때도 딱 이 시간이었다. 9시 31분 20초. 얼마나 행복에 겨웠었던지 그 시간마저 외울 만큼 행복해 했었다.
함께 낡은 옥탑방을 함께 수리하고, 몇 안 되는 살림살이를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 보일러를 틀 돈도 없어 본가에서 가져온 낡은 난로로 추운 방을 지폈고, 낡은 솜이불에 시린 몸을 밀어 넣고 잠이 들었어도 행복했다. 부끄러움이 많아 감정 표현이 적은 제 동생에게 맞춰 제가 먼저 손을 내밀면 볼멘소리를 내뱉어도 손을 놓는 일이 없었다. 가난했어도 행복했어요. 언젠가 티비에서 보았던 사랑스러운 연인처럼, 말로 내뱉지 않아도 피부로 느꼈다. 너와 있는게 나의 행복이야.
그런데 이제는 행복 대신 아쉬움과 담담함만 남아서 무언가를 느낄 수도 없다. 머릿속을 부유하는 잡념들은 제 역할도 다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미련이 진득하게 남을 시간도 없이 빠르게 빠르게 사라진다. 그는 상념에 잠긴 제 머릿속을 깨끗하게 비워냈다. 이제 흐릿하게 사라질 추억들에 대한 기억일 뿐이었다. 표정도, 머릿속도 차분한데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리운 추억. 그러워질 이 시간. 제 속에 깊숙히 밀어넣었던 모든것들이 빛이 드는 창으로 손을 뻗길 원하는 시간.
손길이 분주해진다. 숨이 가빠지기 전에 모든것을 끝내기로 한다. 좁은 방안에 구석구석 숨어있는 애정이 담긴 물건들을 찾아내며 제 속에 담긴 마음도 작은 상자안에 담아냈다.
상자 안에 들어있는 물건들은 많지 않았다. 작은 사진집 하나, 공책이 몇 개, 목걸이가 든 케이스가 하나, 작은 고양이 인형이 하나, 액자가 두 개 그리고 손 위에 반지 하나. 그렇게 행복했는데 남은 건 이것뿐이야. 만일 사랑이 물질이라면, 우리의 사랑은 이정도 뿐인거야.
받은 것도 준 것도 많지 않은 사랑이었다.
준 것 없는 모자란 사랑이었어요. 그저 제 곁에 있는 사람이 좋아 웃었고, 사랑의 말보단 따스한 손길을, 한 번의 입 맞춤 대신 조심스런 눈짓을 주었던 사랑이었다. 더 많이 표현하고 더 많이 다가갈껄. 준 것이 모자라서 이 사랑은 이렇게 끝나나보다. 애정은 넘쳐나는데 서로 무엇이 무서워서 제 것을 주는걸 겁냈을까. 결국 이렇게 끝난 뒤에는 길바닥에 버려야 할 감정인걸.
그는 작은 상자 안에 차곡히 모인 물건들을 다시 한 번 살폈다. 하나, 둘.. 하나하나 세어가는 숫자에는 그 속에 담긴 추억이 있었다. 이제 필요 없는 것들이었다. 버려질 것들 이었다.
이제 가볼까. 작은 상자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그는 제 흔적이 깨끗하게 지워진 보금자리를 떠났다.
하늘에선 커다란 눈송이가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그는 신발장 한 켠에 준비된 보라색 우산을 썼다. 낡은 보라색 우산은 이 마지막 길을 장식하기 알맞은 것이었다. 네 색이 파란색이고 내 색이 보라색이라면, 비오는 날은 보라색 우산을 써줬으면 좋겠어. 그때부터 그의 우산은 언제나 보라색. 이치마츠의 우산은 파란색이었다. 그렇게 하자고 서로에게 약속했다. 빨개진 얼굴로 딴청을 피우던 얼굴과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를 기억한다. 답지않게 팩 돌아간 고개가 귀여워 웃고 말았었다. 귀여웠는데. 저도 모르게 푸스스 짓는 웃음들이 새하얀 수증기에 흐려졌다. 좋았는데.
이미 모든 감정과 미련은 제 속 깊숙한 곳 안에 잠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에 차오르는 아지랑이들을 보니 그게 아니었나보다. 슬프고 슬퍼 고여든 감정들이 머리를 마비시키고 마음을 마비시키고 그러다 결국 가득 차올라서 넘쳐 흘렀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눈앞이 뿌옇게 가라앉고 입에선 비명을 쏟아냈다. 몸이 거부한다. 다시 돌아가려며 소리친다. 다시 그 곳으로 돌아가. 다시 돌아가서 새로 시작해. 매달리고 울부짖어.
그러나, 그러나, 이치마츠, 이치마츠, 아아.
엉엉 울음을 쏟아내는 제 몰골이 얼마나 추례할지 알고있다. 그 모습을 비웃으며 손을 내뻗어 줄 이치마츠의 모습을 알고있다. 그러나 그는 되돌아갈 수 없었다.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너를 막을수가 없어. 네 앞을 막을 수 없어. 나는 그럴 수 없어. 네가 행복해지는 걸 보고싶어. 네가 웃는 모습을 보고싶어. 추운밤 서로의 온기로 밤을 지새야하는 것보다, 따스한 방안에서 네 연인과 서로 미소 짓는 모습을 보고싶어. 가난했어도 행복했어요. 그것을 마지막으로 죽은 연인의 사진을 쓸어내리던 티비 속 여인의 모습을, 그는 어떻게 바라보았나. 자신으로 인해 이치마츠가 버려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한때 그런것들을 모두 무시 할 만큼 서로의 사랑이 크노라 외쳤으나,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막을 수 없어. 그럴 수 없어. 네가 행복해 지길 바라니까. 욕심을 위해 때로는 손에 쥔 것을 놓을 줄도 알아야했다. 서로의 행복을 위해서. 너의 행복을 위해서.
미안해.
네가 행복해지면 좋겠어.
네가 행복해지면 좋겠어.